본문영역

전문가 기고

행복미학(美學)

행복미학(美學)은 학계, 법조계, 언론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가 흥미로운 가족 관련 이슈에 대해 기고하는 칼럼입니다.
이번 호에는 5월 가족의 달을 맞아 가족 호칭과 관련하여 신지영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님의 글을 실코자 합니다.

가족 호칭, 행복한 가족의 출발 사진

가족 호칭, 행복한 가족의 출발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신지영

지난 5월 15일, 가정의 날을 맞아 이루어진 한국건강가정진흥원의 2019년 제2차 가족포럼의 주제는 가족 호칭과 관련된 것이었다. ‘가족 호칭, 나만 불편한가요?’라는 질문을 던지는 포럼이었다. 여성가족부가 2019년 시행 과제로 ‘성 비대칭적 가족호칭 개선’을 설정한 만큼, 한국건강가정진흥원의 포럼 주제는 시의 적절했다고 생각한다. 또한, 정부의 역할 중 가장 중요한 것이 토론회와 같은 공론의 장을 마련하여 다양한 목소리가 오갈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라는 점에서도 가치 있는 시도였다고 생각한다.

보통 가족 호칭이 문제가 되는 경우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볼 수 있다. 하나는 부를 말을 몰라서 문제가 되는 경우다. 평소에는 별로 부를 일이 없으니 큰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서 정확히 알지 못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쓰기가 불편해서 문제가 되는 경우다. 어떻게 불러야 하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지만, 그 호칭으로 부르기가 꺼려지는 것이다. 전자의 경우, 즉 몰라서 못 부르는 것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적당한 호칭을 찾아서 부르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후자의 경우, 즉 알지만 부르는 것이 편치 않은 경우는 문제가 된다.

불편하면 부르지 않으면 되지 않을까? 물론 맞는 말이다. 불편하면 부르지 않으면 된다. 하지만 문제는 대면하여 말을 하려면 상대방을 부르지 않으면 안 된다는 데 있다. 대면하여 말을 해야 하는 일이 생기면 우리는 대화의 상대를 불러야 한다. 그런데 한국어는 공손성의 이유로 대화 상대자를 2인칭 대명사를 사용해 부르지 못하는 특징을 지니고 있는 몇 안 되는 언어 중 하나다. 언어 유형론을 연구하는 연구자들에 의하면 207개 언어를 분석한 결과, 한국어처럼 공손성의 이유로 2인칭 대명사의 사용을 꺼리는 언어는 7개 언어에 불과하다고 한다.

이렇게 한국어로 말할 때는 아무에게나 ‘너’나 ‘당신’을 쓰는 것이 무례하게 받아들여진다. 아무에게나 '너'나 '당신'을 썼다가는 싸움이 나는 언어다. 게다가 상대의 이름을 부르는 것도 매우 제한된 관계에서만 가능하다. 그러니 한국어로 말을 하기 위해서는 대부분의 경우에 대화 상대자를 부를 호칭어가 필요하다. 한국 사회에서 호칭어 문제가 지속적으로 제기되는 이유가 바로 한국어의 이러한 특징과 관련이 있다.

한국어로 말을 할 때는 대부분의 경우 2인칭 대명사로도, 이름으로도 상대의 부를 수 없으니, 상대와 나와의 관계에 맞는 호칭어를 사용해야만 한다. 이런 상황에서 호칭어가 불편하다면 말을 하는 것 자체가 자연히 불편해지게 된다. 그 불편함을 피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물론 말을 아예 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말을 하지 않는다면 관계는 지속될 수 없다. 모든 인간관계는 말을 통해 맺어지고 유지되기 때문이다. 서로 말을 하고 싶지 않아지면 관계는 당연히 정리의 수순을 밟게 된다.

가족 호칭어가 중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가족 관계를 청산하고 싶지 않다면 가족 관계 호칭어 문제에 귀를 기울여야만 한다. 누가, 무엇을, 왜 불편하다고 하는지 말이다. 지금까지 모두 다 그렇게 불러 왔는데 왜 너만 그렇게 부르려 하지 않냐고 윽박지르며 혀를 찰 것이 아니라 왜 그렇게 부르는 것이 불편한지, 불편하다면 어떻게 하면 불편해하지 않을 수 있는지 서로 이야기를 나누어야 한다.

호칭이란 상대를 부르는 말이다. 상대와 나와의 관계에 대해 내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나의 입을 통해 말하는 것이다. 만약 내가 누군가를 ‘아버지’라고 부른다는 것은, 나는 당신을 아버지로 생각하고 있다는 뜻이 된다. 그리고 이 호칭을 통해 당신과 나와의 관계를 나는 부모 자식 관계로 인식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결혼을 해서 배우자의 부모님을 ‘아버님, 어머님’이라고 부르라고 하는 것은, 결혼을 통해 새로운 가족이 되었으니 배우자의 부모님을 새로운 부모님으로 여기라는 뜻이 숨어 있다. 새로운 부모 자식 관계가 만들어졌음을 인식하라는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결혼해서 여성만 배우자의 부모님을 ‘아버님, 어머님’이라고 부른다는 점이다. 남성이 결혼을 하면 배우자의 부모님을 ‘장인 어른, 장모님’이라고 부르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여성은 결혼을 통해 새로운 부모님이 생기지만 남성은 결혼을 통해 새로운 부모님이 생기지 않는다는 뜻이 그 호칭에 담겨 있다. 여성이 결혼을 하면 배우자의 부모님을 ‘아버님, 어머님’이라고 부르며 부모 자식 관계를 맺는 반면에, 남성이 결혼을 하면 배우자의 부모님을 ‘장인 어른, 장모님’이라고 부르며 부모 자식 관계가 아니라고 선을 긋는 것이다.

이렇게 과거의 세계관이 호칭에 그대로 담겨 있음을 알 수 있다. 결혼을 통해 여성은 자신이 태어나 자란 가족으로부터 가족 관계가 정리되고 결혼을 통해 배우자의 가족에 편입된다는 소위 ‘출가외인’의 세계관이다. 남성은 결혼을 한다고 ‘출가외인’이 되지는 않는다. 여성에게 결혼은 새로운 부모님을 얻게 되는 일인 반면에 남성에게 결혼은 새로운 부모님을 얻게 되는 일이 아니라는 세계관이 호칭에 그대로 담겨 있다.

더 흥미로운 것은 결혼한 여성이 배우자의 부모님을 ‘아버님, 어머님’이라고 부르는 데도, 그 부모님은 새로 얻은 가족을 자식으로 생각하지 않는다고 호칭으로 선을 긋는다는 것이다. 자식을 부르는 방법으로 아들의 배우자를 부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 부모님은 아들의 배우자를 ‘며늘아’, ‘며늘아가’라는 호칭으로 부르는 것을 통해 알 수 있다. 한쪽은 ‘아버님, 어머님’이라고 부르며 ‘저는, 저와 당신의 관계를 부모 자식 관계로 인식하고 있다’고 매번 부를 때마다 고(告)하고 있지만, 다른 한쪽은 ‘며늘아’ 혹은 ‘며늘아가’라고 부르며 ‘나는, 나와 너의 관계를 부모 자식 관계로 인식하고 있지 않다’고 부를 때마가 선을 긋는다.

가족 관계 호칭어는 이전 시대에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니 그 시대가 공유하고 있던 세계관이 호칭어에 그대로 담길 수밖에 없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남녀차별이 당연하게 여겨지던 세계관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호칭이 현재의 세계관으로 볼 때 어색하게 느껴지는 것은 그래서 당연하다.

언어가 담고 있는 세계관과 우리가 추구하는 세계관 사이에 거리가 생긴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가 추구하는 세계관을 바꿔야 할까, 아니면 우리가 추구하는 세계관을 담을 수 있도록 언어를 바꿔야 할까? 답은 너무나도 명확하다. 언어는 사회적 약속에 불과하니 언어 사용자들의 합의를 통해 언제든지 바꿀 수 있는 것이다. 흔히 언어는 생각을 담는 그릇이라고 한다. 생각이 커져서 그릇이 그 생각을 담을 수 없다면, 생각을 줄일 것이 아니라 그릇을 바꾸면 된다. 사회의 구성원들이 합의를 통해 만들어가는 것이 언어이기 때문에 언어의 수준은 그 사회의 수준이 된다.

이러한 맥락을 이해한다면 가족 관계 호칭어가 불편하다고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전통을 무시하거나 전통을 무조건 부인해서가 아니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가족 호칭과 관련된 논란을 두고 왜 전통을 무시하고 지키려 하지 않느냐, 우리 것을 버리고 왜 서양 문화를 무조건 따르려고 하느냐고 반응하는 것은 논란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탓이다.

만약 우리의 전통이 신분제와 성차별적인 세계관을 받아들이지 않고는 지켜질 수 없는 것이라면 과연 그 전통은 우수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또, 우리는 왜 신분제와 군주제의 오랜 전통을 청산하고, 민주주의의 새로운 전통을 세우기 위해 노력해 왔으며, 지금도 그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고 있을까? 또한, 우리의 전통이 우수하다면 우리가 추구하는 민주, 평등, 인권의 가치를 존중하는 세계관을 통해서도 충분히 지켜낼 수 있는 보편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을 테니 무시될 리가 없지 않을까?

지금이야말로 이러한 근본적인 질문을 우리 스스로에게 던져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신지영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신지영

공유 및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