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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사례

행복미담(美談)

첫번째 사례

2018 가족정책서비스 이용 우수사례_ 인식개선부분 최우수상

☞ 2018 가족정책서비스 이용 우수사례 인식개선부분 최우수상의 이야기를 통해 센터의 봉사단 활동이 끼친 한 가족의 놀라운 변화를 살펴보는 시간을 가져봅니다.

‘다다름’ 봉사단과 함께 한 이후

동작구 건강가정·다문화가족지원센터 정○○

‘다다름’ 봉사단과 함께 한 이후 이미지

쉽지 않았던 나의 한국 생활 적응기

집으로 올라가는 언덕배기에 핀 무궁화를 보고 남편에게 “저게 무슨 꽃이야?”라고 묻던 게 마치 어제 일처럼 느껴지네요. 그런데 어느 덧 내 나이 42세, 결혼한 지 17년, 세월은 야속하게도 뒤도 돌아보지 않고 힘겨움 없이 잘도 흘러가는 것 같아요.

그래도 간혹 세월이 많이 좋아졌음을 실감해요. 요즘에는 결혼이주민을 지원하는 다문화가족지원센터, 외국인지원센터 등 여러 기관이 생겼지만, 제가 입국했던 2001년도에는 거의 없었기 때문인데요. 그래서인지 한국 생활 적응이 쉽지 않았어요. 더군다나 양가 부모님들의 결혼 반대도 힘든 적응에 큰 몫을 했죠.

딸이라곤 저 하나뿐인 친정 엄마도 사위 밥을 해주지 않을 만큼 반대를 하셨어요. 중국 사람들은 결혼 후 도망간다는 인식을 갖고 계셨던 시부모님 역시 “중국 사람은 결혼하고 애를 낳고도 도망간다던데…”라고 하실 만큼 극심한 반대를 하셨죠.

그때 만약 다문화가족지원센터가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제 답답한 마음을 센터 상담 선생님께 털어놓았더라면…. 지금도 같은 처지의 결혼이주민과 어울리며 위로 받았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종종 하곤 해요.

구세주처럼 등장한 동작 센터와 ‘다다름’ 봉사단

다문화가족지원센터는 제가 힘든 세월을 우울증으로 겪어내고 난 뒤 생겼어요. 센터는 결혼이민자들에게 구세주나 마찬가지였는데요. 생소했던 한국어, 요리 · 김치 만들기 프로그램, 문화교육, 이중언어 직업교육 등 많은 유익한 프로그램을 센터를 통해 만났어요.

그리고 다양한 역량 강화를 거쳐 비록 계약직이지만 은행에도 취업했어요. 현재는 법원이나 경찰서에서 사법통역관으로 활동하면서 주중 프로그램에는 거의 참여하지 못하고 있지만요.

그러던 중 올 2월, 다문화가족지원센터 조OO 팀장님을 통해 주말 프로그램으로 ‘다다름’ 봉사단이 꾸려지는데 함께할 생각이 없느냐는 연락을 받았어요. ‘다다름(‘함께 다다른다’를 의미함)’ 봉사단은 기존 건강가정지원센터의 ‘모두가족봉사단’과 다문화가족지원센터의 ‘다다봉사단’ 그리고 고등학교 ‘성평등 관련 동아리’가 함께 하는 활동인데요.

봉사단의 설립 취지는 다양한 가족이 지역사회와 관련된 하나의 목적 활동에 참여함으로써 동질의식이 형성되고, 관내 가족들이 ‘마을 살리기’에 동참하면서 지역사회에 소속감을 갖는 데 있어요.

그동안 저는 중국어를 가르치는 것에 보람을 느껴 출입국관리사무소와 대학병원에서 언어 제공 봉사를 해왔어요. 하지만 ‘다다름’ 봉사단은 선주민들과 함께 한다는 것에 멈칫할 수밖에 없었어요. 왜냐하면 그동안 사회생활을 하면서 제가 중국 사람인지를 몰랐을 때는 일도 잘하고 친절해서 좋다고 했던 분들이, 중국에서 왔다고 하면 태도가 바뀌는 모습을 많이 봐왔거든요.

하지만 그 많은 프로그램을 원활하게 운영해온 조OO팀장님의 든든한 지원이 이어진다면, 이번에도 성공할 거라는 믿음이 있었어요. 그래서 딸과 함께 봉사단을 신청했죠. 봉사 활동의 주요 내용은 ‘충효길 가드닝(꽃 심기)’, ‘현충원 비석 닦기’ 등을 통해 역사 공부를 함께 하는 것이었어요.

봉사 활동을 통해 생긴 우리 가족의 놀라운 변화

‘다다름’ 봉사단과 함께 한 이후 이미지

봉사 활동 첫날은 서먹서먹한 가운데 선주민은 선주민끼리, 이주민은 이주민끼리, 고등학생은 고등학생끼리 함께 어울리며 마무리되었어요. 그렇게 한두 번 함께 현충원 비석 닦기를 하면서 분위기가 달라졌어요.

처음 안중근 의사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을 때였어요. 선주민들과 고등학생들이 이주 배경에 대해 알게 되면서 고향이 중국 어디냐고 묻기까지 했어요. 때마침 제 고향이 흑룡강 하얼빈이었기에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하게 됐고, 저 역시 사춘기 아이들에게 조언을 해주며 관계의 물꼬를 텄어요.

그뿐인가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아이에게도 변화가 찾아왔어요. 저는 지금까지 한국 생활을 하면서 중국에서 온 사실을 속인 적이 없었어요. 학교 부모 모임에서도 이야기를 한 적도 있고요. 그래서인지 딸아이가 2학년 때 학교 친구와 이야기를 하다 “너네 엄마는 중국에서 왔잖아”라면서 무시하는 듯 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제가 속상해할까 혼자 속을 썩인 일이 있었어요. 그 사실을 며칠 후 집에 놀러온 딸아이의 친구를 통해서 듣게 되었을 때 얼마나 가슴이 아팠는지 몰라요.

딸아이는 그저 제 뱃속에서 태어난 죄 밖에 없는데 말이에요. 그날 저는 옛날에 중국으로 건너간 외할아버지 때문에 엄마는 중국에서 태어났을 뿐, 우리는 다 같은 민족이라는 사실을 설명해주었어요. 하지만 딸아이의 자존감은 크게 향상되지 않았어요.

그러던 중 딸아이가 현충원에서 안중근 의사 등 여러 독립 운동가들의 독립운동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난 뒤 “엄마! 할아버지가 그때 중국에 갔으니, 엄마도 중국에서 태어났을 뿐 원래는 우리나라 사람이었던 거네?”라고 말하는 거예요. 그리고 우리가 이렇게 편하게 살 수 있는 건 독립 운동가들이 목숨을 걸고 독립운동을 해서였구나”하면서 시골에 가면 무덤이 무섭다고 근처에도 안 가던 녀석이 두 팔을 걷고 비석들을 쓱싹쓱싹 닦지 뭐에요.

그날 저녁, 남편이랑 이야기를 하면서 눈물을 얼마나 흘렸는지 몰라요. 그것은 딸아이가 어떤 과정을 넘어선 것 같은 마음에 흘린 안도의 눈물이었죠.

마음의 위안을 얻게 해준 ‘다다름’ 봉사단

‘다다름’ 봉사단과 함께 한 이후 이미지

딸아이는 요즘은 “너네 엄마 중국 사람이지?”라고 하면 “응! 우리 엄마 중국 사람이야. 안중근 의사가 돌아가신 하얼빈에서 태어났어! 너희 엄마 고향은 어디야?”라고 되물을 정도로 자존감이 향상되었어요. 그런 딸의 모습을 보며 저는 한시름을 놓았죠.

마지막으로 ‘다다름’ 봉사단을 만들어 주신 동작구 건강가정·다문화가족지원센터와 모두 잘 어울릴 수 있도록 도움을 주신 조OO팀장님께도 거듭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어요. 어쩔 수 없이 지게 된 마음의 짐을, 그 어디에서도 이루지 못했던 사랑하는 딸아이의 자존감을 ‘다다름’ 봉사단이 올려주었기 때문이에요.

저는 ‘다다름’ 봉사단이 너무 좋아요. 좋은 것을 넘어 사랑하게 됐어요.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운영되었으면 좋겠어요. 타 센터에서도 이런 봉사단이 운영되어 많은 결혼이주민이 저처럼 마음의 위안을 꼭 얻었으면 좋겠어요.


두번째 사례

양육비 이행지원 서비스 이용 우수사례_양육비 심판청구를 통한 양육비 증액

☞ 양육비 심판청구를 통해 양육비 증액 및 면접교섭권을 획득한 성공사례를 소개합니다.

  • 신청인 L씨
  • 피신청인 P씨
  • 자녀 1명

10년 만에 만난 붕어빵 부자, 함께 미소 짓다

10년 만에 만난 붕어빵 부자, 함께 미소 짓다 이미지

양육비 증액과 면접교섭을 희망하다

신청인(양육자) L씨와 피신청인(비양육자) P씨는 2007년에 이혼했습니다. 당시는 양육비 부담조서 작성제도 시행 전이었어요. 이혼 후, 신청인(양육자) L씨는 피신청인(비양육자) P씨로부터 월 30만 원의 양육비를 협의 하에 지급받아 왔습니다.

그 시간이 흘러 어느새 10년이 되었고, 신청인(양육자) L씨는 자녀의 양육비가 증액되기를 희망했습니다. 그리고 2017년 11월, 양육비이행관리원에 도움을 요청하여 양육비 심판청구를 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신청인(양육자) L씨는 소송 승패 여부를 떠나 양육비이행관리원 담당자가 작성한 소장과 준비서면을 읽으면서 한참을 소리 내어 울었습니다.

“10년 동안 홀로 자녀를 양육하면서 받은 고통이 컸어요. 그런데 그 어려움을 알아주는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에 큰 위로와 용기를 얻었어요.”

또한 이혼 당시 만 1세였던 자녀는 10년 동안 단 한 번도 아빠를 보지 못한 상황이었습니다. 신청인(양육자) L씨는 이번 청구 건으로 자녀와 피신청인(비양육자) P씨가 면접교섭을 할 수 있게 되기를 희망했습니다.

위태로운 두 모자를 위한 양육비이행관리원의 노력

이혼 당시 29세였던 신청인(양육자) L씨는 돌이 갓 지난 자녀를 24시간 어린이집에 맡기고 철야근무를 하면서 소득활동과 양육활동을 병행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우울장애와 공황장애를 앓게 되었고, 그때부터 시작된 정신과 치료를 지금까지도 받고 있습니다.

10년 만에 만난 붕어빵 부자, 함께 미소 짓다 이미지

현재 초등학교 6학년인 자녀도 5세부터 정신 불안증세 및 공격적 행동을 보여 정신과에서 2년 동안 약물치료를 받았습니다. 아이는 “왜 아빠 없이 나를 길렀냐?” “엄마 없이는 못 살겠다”, 엄마에 대한 양가감정을 드러내거나, 훈육을 하는 엄마를 폭행하는 등 심리 치료가 시급한 상태였습니다.

양육비이행관리원에서는 피신청인(비양육자) P씨가 자녀의 장래 양육비로 월 80만 원을 지급할 것을 청구했습니다. 하지만 피신청인(비양육자) P씨는 4대 보험에 가입되지 않은 직장에서 월 125만 원의 급여를 받고 있다며, 현재 이행하고 있는 월 30만 원의 지급도 계속하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문서제출명령 및 사실조회신청으로 근로소득으로 추정되는 예금거래내역을 확인한 결과, 소득이 월 250만 원 이상이라는 것이 입증됐습니다. 이로써 2018년 7월부터 월 40만 원, 자녀가 고등학교에 입학하는 2022년부터는 월 50만 원으로 장래 양육비를 단계적으로 증액하기로 임의조정 했습니다.

10년 만에 법정에서 만난 붕어빵 부자

10년 만에 만난 붕어빵 부자, 함께 미소 짓다 이미지

한편, 신청인(양육자) L씨는 자녀와 함께 법원에 출석했습니다. 그리고 피신청인(비양육자) P씨와 자녀는 10년 만에 아빠와 아들로서 만나게 되었고, 그들은 미소를 지으며 서로에게 반가움을 표했습니다.

“갓난아기 이후 10년 만에 아이를 보게 된 것인데 저와 너무나도 닮은 모습을 보니 저절로 웃음이 나오더군요. 앞으로 아이와 꾸준히 만나려고 해요.” 피신청인(비양육자) P씨는 이번 만남을 계기로 면접교섭을 꾸준히 이행하기로 다짐했습니다.

신청사유
  • - 자녀 양육비 지출 증가로 인한 양육비 증액
  • - 10년 만의 면접교섭을 위한 양육비 심판청구
지원결과
  • - 장래 양육비의 단계적 증액
    (2018년 7월부터 월 40만 원/2022년(자녀 고등학교 입학 시) 월 50만 원)
  • - 이혼 10년만에 첫 면접교섭 실시
  • - 피신청인과 자녀의 첫 면접교섭 후 꾸준한 면접교섭 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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